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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와신학 > 세계 신학자와의 대화(5)
문화와신학 (2013년 3월호)

 

  기독교 윤리를 넘어 정치신학으로 - 올리버 오도노반
  

본문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 1945년생)는 영국 성공회 신부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개신교적 입장에서 자연법 전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였고, 근대 이전의 기독교 전통을 통해 현대 자유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독교 윤리와 정치신학에 대한 업적과 공헌을 인정받아 2000년에 영국학술원 회원(FBA)과 2009년에 에딘버러 왕립회 회원(FRSE)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의 위클리프 컬리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와 에딘버러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삼부작 『부활과 도덕적 질서』(1986), 『열방의 욕망』(1996), 『심판의 길들』(2005)은 영어로 쓰여진 기독교 윤리와 정치신학 관련 서적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늘 손꼽힌다. 또한 그는 전쟁, 성 윤리, 동성애 등 논란이 많은 주제들에 대해서도 균형 잡히고 현실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좪기독교사상좫은 오도노반 교수와 2012년 12월 1일 런던 빅토리아 역(Victoria Station)에서 대화를 나눴다.

기상: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신학이 한국 독자들에게 생소하기 때문에, 이 인터뷰가 교수님의 정치신학 (political theology)을 소개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약간 도전적인 질문부터 할까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현대 신학을 위한 자신의 가장 큰 공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도노반: 저는 기독교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정당한 전쟁 [혹은 정전 (just war, 正戰)]과 같은 고전적인 윤리적 주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실천 이성의 신학적 기반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주제를 기독교인들이 최근까지 심도 있게 성찰하지 않다 보니, 사회에 통용되는 일반 이론들이 무작위적으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저는 ‘복음’과 ‘하나님의 활동’의 빛 아래서 우리의 실천 이성, 실천적 삶, 실천을 구성하는 방식 등을 살펴 보고자 했습니다.

기상: 교수님이 다른 영역이 아닌 ‘실천’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근원적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신학화 과정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셨습니까?

오도노반: 사실 저는 전쟁 윤리에 대해 생각하다 정치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스승이셨던 폴 램지(Paul Ramsey, 1913-1988. 주: 감리교 배경을 가진 미국의 윤리학자로 ‘정당한 전쟁 이론’을 개신교 윤리의 주요 주제로 다시 끌어 내었다)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열정적인 대표적 사상가이죠. 그는 기독교의 전쟁 윤리 이면에는 기독교 정치 공동체와 그 기능에 대한 독특한 이해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치신학에 관한 제 첫 번째 질문은 ‘이 독특함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저는 기독교 전통, 특히 16-17세기 이후의 정당한 전쟁에 대한 고전적 작품들에서 ‘기독교 정치 공동체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공동체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등의 논의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적절한 윤리적 토대와 결과에 대한 성찰 없이 윤리적 질문을 던지고 답해 왔습니다. 윤리나 실천 이성에 대한 질문이 정치신학, 즉 정치적 기구와 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이해로 넘어갈 때 도덕적 질문을 바로 파악하게 되고 이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됩니다.

정치신학이란 무엇인가?

기상: 여기서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기독교 윤리’를 ‘정치신학’과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오도노반: 윤리적 질문은 언제나 실천적 질문, 즉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면서 구성됩니다. 정치신학은 ‘어떤 상황(case)인가?’ ‘우리가 속해 있는 정치 기구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이러 저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하도록 요구받나?’하는 실천적 질문과 ‘이러한 윤리적 상황이 이뤄지는 기관과 조직은 무엇인가?’라는 신학적이고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질문 사이에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정치에 대한 기독교인의 토론은 잘못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천적 질문 없이 정부가 무엇이고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라고 선언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고 적절하지도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정부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말하지 않고 고도의 윤리적 질문을 하는 것도 아주 쉽습니다. 이 둘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습니다. 정치에 대한 두 질문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좋은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기상: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 기독교적 컨텍스트 속에서 실천 이성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실천 이성의 독특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오도노반: 윤리에 대한 저의 첫 번째 이론서인 『부활과 도덕적 질서』 (The Resurrection and Moral Order)는 도덕 체계와 윤리적 삶을 신학적, 특히 복음적 컨텍스트에 놓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이 컨텍스트는 그리스도에 의한 세계의 구원이라는 복음에 의해 형성된 것입니다. 복음적(evangelical)이라고 할 때 저는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윤리의 밑바탕에는 기독론이 있습니다. 도덕을 꿰뚫는 새로운 창조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가르치고, 계시하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성령론도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우리가 윤리를 이야기할 때 고려해야만 합니다. 저는 기독교적 실천 이성이라는 큰 주제 아래 이러한 주제들을 구성하려 했습니다.
저는 선포하고,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의 문제까지 나아가려 했습니다. 이론적 이성이나 추론적 이성은 그 대상에서 멈춰버립니다. 실천 이성은 그 앞에서 멈추거나, 넘어서거나, 포착할 수 없는 대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실천 이성은 우리가 무엇을 하도록 부름 받았는가에 집중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신학이 묘사적인 신학이 되는 것에 만족합니다만, 우리는 그것보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기상: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실천 이성은 성서 해석과 분리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실천 이성이 개발되도록 성서를 윤리적이고 포괄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까?

오도노반: ‘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는 것이 ‘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성서 해석에 많은 오류들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오류는 적절한 구절을 찾고자 성서를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실천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가장 유사한 본문을 찾아나가는 방법이죠. 이러다 보면 각자가 가진 생각의 습관에 따라 서로 다른 구절을 찾아내겠죠. 우리는 성서를 이렇게 선택적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서를 잘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서가 성서 자체의 범주들을 우리에게 제시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서의 기본적 서사 구조와 예언의 형식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도전과 약속 등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실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범주가 주어집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믿음’은 무엇일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성찰하면 신학의 고전적 범주인 ‘믿음’은 실천척 범주가 되고 실천적 의미를 얻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실천적 영역과 이론적 영역을 구분하고자 한다면, 결국은 ‘실천 이성은 사랑밖에 할 말이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에서 보여지듯, 믿음은 신약성서의 가장 실천적 범주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믿음은 살아있는 것이고 활동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의 이야기, 설명, 선포 등으로부터 실천의 범주를 발견하고 경이로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 기독교적 프락시스의 기반

기상: 교수님의 주요 저작 중 첫 번째로 『부활과 도덕적 질서』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 윤리의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즉 현실주의 원리(The Realist Principle), 복음주의 원리(The Evangelical Principle), 부활절 원리(The Easter Principle)입니다. 이 세가지 원리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신 다음 이 원리들이 기독교인의 삶을 다르게 해석하는 틀이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오도노반: 우선 저는 이 원리들을 통해 선과 악은 우리의 마음, 욕망, 의지를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중적 이론에 반대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나칠 정도로 주관적 기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선하고 다른 것은 악하게 만드는 가치란 이 세계의 질서에 새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주의 원리입니다. 그렇기에 도덕적 성찰에 있어 ‘내가 뭘 해야 하지?’라며 분주하게 묻기 전에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세계란 단지 우리가 사는 중립적 장소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과 악의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역사 안에는 어떤 일들이 한때는 참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참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가장 근원적 묘사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 것이고, 가장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바탕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주의 원리입니다. 여기서 저는 ‘창조에 기초한 도덕적 질서’와 ‘인간의 특수한 위치를 강조하는 구원의 질서’를 구분하는 개신교 전통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와 그리스도를 통해 하셨던 일을 통해 도덕적 사고를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도덕적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질서를 회복시키고, 확증하시는 활동에 비추어 생각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절 원리입니다. 부활은 구원을 통해 창조를 재확인하고, 언약을 이루시고, 피조 세계를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죽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은 아담이 다시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 가져오신 질서는 우리의 창조성에 대해 새롭게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성취이지 부정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창조된 모든 것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희망의 지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일으키신 그리스도가 우리 옆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상: 부활이 우리의 윤리적, 정치적 사고와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내지는 순간이 된다고 말한다면, 교수님께서는 부활 이전의 윤리적, 정치적 질서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부활 전후의 도덕적 질서를 어떻게 연결하십니까?

오도노반: 우선 도덕적 질서와 정치적 질서를 구분해 보도록 합시다. 도덕적 질서는 우리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그 속에서 자라납니다. 즉, 이는 정치의 영역과 무관한 독립된 질서입니다.
도덕적 질서 자체를 파괴하려는 힘, 혹은 인륜성을 부정하려는 타락한 인간의 성향으로부터 도덕적 질서를 지켜내는 것이 정치적 질서입니다. 우리가 아는 정치적 질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합니다. (신학적 의미의) 정치적 질서는 죄를 전제하며, 죄에 대항하고, 우리의 파괴적 본성을 극복하게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과업을 완벽하게 할 수 없습니다만, 우리가 서로에게 끼칠 수 있는 폭력을 최소화할 수는 있습니다.
제 생각에 정치적 질서란 죽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아주 중요한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정치적 질서는 그 역할을 다합니다. 그렇기에 정치질서는 잠정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땅의 왕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그들의 왕관을 내려 놓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것은 창조세계의 사회라든지 질서가 하나님의 주권과 상응하는 면이 있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정치적 구조가 진화하고 있음을 봅니다.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정치적 질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 질서는 부활로 인해 새로운 형태를 가집니다. 이러한 새로움은 기존의 정치적 질서를 폐기하고 극복한다는 하나님의 선포와 함께 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 문명은 정치 질서를 우상숭배화하는 것에 제한을 가합니다. 이는 정치가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자신감을 갖는 것을 막아줍니다. 기독교는 정치적 사회(political society)가 아닌 공동체의 중요성을 제시합니다. 정부의 정치 구조와 차별화된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가고 새로움을 배워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예들이 왜 기독교의 시작과 함께 우리가 정치에 대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게 됩니다.

권위 - 정치신학의 주요 범주

기상: 교수님의 정치신학의 핵심에는 권위의 재해석이 놓여 있습니다. 왜 정치신학에서 권위의 문제가 중요합니까?

오도노반: 저의 논의는 권위를 터부시 하는 도덕적·정치적 범주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권위에 대한 논의를 피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권위를 경험하고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에 대한 논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권위를 나쁘게 경험하고 실행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악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부정한 권위는 선이 부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권위를 부패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권위를 자의적으로 사용하거나, 권위의 문제를 단순히 주의주의(voluntarism, 主意主義. 주: 의지를 지성보다 높이 두거나, 세계의 본질을 의지로 보는 철학 사조) 와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권위와 실재(實在, reality)의 관계입니다.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실재가 중재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교사의 권위는 그가 가르치는 진리의 권위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사 자체가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교사를 통해 학생들은 진리를 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교사가 권위를 가지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교사가 가르치는 진리가 학생들에게 길과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전달하는 진리가 거짓으로 드러나면, 교사의 권위는 사라지고 맙니다.
정치적 권위도 진리와 간접적 관계를 가집니다. 정치적 권위도 실재에 기초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 감각에 호소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적 권위는 사라지고 맙니다.

기상: 교수님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권위의 빛 아래서 권위의 초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정치적 권위 혹은 정부의 권위가 어떻게 부활한 그리스도의 권위를 매개할 수 있겠습니까?

오도노반: 정치적 권위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권위와 무관하게 만들어졌고 존재합니다. 하지만 부활한 그리스도의 권위는 정치적 권위에 우선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복음의 틀 안에서 정치적 권위를 ‘잠정적으로’ 승인합니다. 교부들은 이 세상의 권위가 복음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요나와 니느웨성의 회개 이야기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유비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의 권위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실재는 정치적 권위가 어떻게 우리에게 봉사할 것인가 하는 이해를 새롭게 만들어줍니다.

기상: 교수님께서는 기독교적 정치 이해는 로마서 13장 1절에서 시작된다고 지적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서본문은 로마 제국의 폭력적 정치 체제를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13장 1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도노반: 모든 정치신학이 로마서 13장 1절에서 시작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약성서에는 그 외에도 정치신학에 관한 구절이 많이 있지요. 근대에 이르러 로마서 13장이 정치신학의 기초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관습에 비해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정치적 권위의 폭을 아주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정치적 권위를 죄와 폭력과 나쁜 일을 저지하고 통제하는 일과 관련짓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한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이후 시대에 정치적 권위가 어떻게 실행되어야 할지에 관한 비전이 제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웨의 왕적 통치와 부활한 그리스도의 권위

기상: 교수님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열방의 욕망』(The Desire of the Nations)은 권위의 문제를 고찰하고자 구약성서의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의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이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오도노반: 우리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의 이미지로부터 정치적 권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즉 신적 섭리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정치의 권위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왕정 통치라는 이미지는 구약성서 주석을 통해 끌어낸 것으로, 정치적 권위의 본질에 대해 권력(power), 대표(representation), 심판(judgement), 동의(agreement)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게 해 줍니다. 이 세 가지는 특별히 중요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심판하는 책임, 심판을 내릴 수 있는 권력, (대표자를 통해 공동체가 심판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에서 대표자의 위치가 함께 정치적 권위를 구성합니다. 동의는 정치적 권위를 형성하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정치적 권위가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기상: 그렇다면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권위와 신약성서의 부활한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는 어떤 관계입니까?

오도노반: 부활한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는 아직까지는 보편적으로 드러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구조는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현실 속에서 드러내는 교회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 아주 잘 표현되었듯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식하는 것은 모든 인류가 종말 때 해야 할 일입니다.

정치신학의 새로운 도전들

기상: 오늘날 우리의 삶은 세계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권위 혹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권위와 고도로 국제화된 기구들의 정치적 권위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오도노반: 정치적 권위 외에도 다양한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는 매우 널리 퍼진 일반적 개념입니다. 교사, 부모, 조직, 대학교 등 모두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권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형성됩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정치적 권위를 결여하고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선악이 분명히 구분되는 것과 같이 정치적 권위는 심판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치적 권위는 다른 권위와 다릅니다.
다양한 국제 기구들은 서로 다른 권위들을 수용하고 축적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국제 기구의 특징은 이 조직이 매우 많은 사람들의 삶을 상당부분 구성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국제 기구의 크기와 권력이 심판, 즉 선악의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정치적 구조를 넘어설 때는 위험해집니다. 이때 국제 기구는 정치적 권위를 뒤엎거나 넘어설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국제 무역 조직들로부터 발전된 정부를 상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했을 때 동인도회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 정부가 바른 심판을 할 능력이 있는지, 또한 국제무역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을 위해 정의를 지켜줄 수 있느냐입니다.
이러한 산업적, 상업적 조직들이 정치적으로 진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실천의 영역에서 다룰 문제입니다. 실천의 영역에서는 국제 조직들이 정치화되는 것을 막거나 뒤엎을 필요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직들이 크고 국제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 다국적 조직은 권위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권위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하며, 정의를 위해 힘쓰는 기구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정의를 위한 기구들은 초국가적일 수도 있고 지역 공동체에 기반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영국에서 대형 슈퍼마켓 유통망이 지역 개발 계획과 제한을 무시하고 거대한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을 비판합니다. 이것은 권위, 특히 그 지역 공동체의 권위를 해체시키는 것입니다.

기상: 만약 국가가 인간의 법을 지탱하는 조직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입법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도덕적 진공 상태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타협 과정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공공의 도덕성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도노반: 타협에도 좋은 타협과 나쁜 타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타협이라는 말은 나쁜 인상을 줍니다. 그 이유는 이 말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부가 하기를 기대하는 일은 우리가 삶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의 다른 버전(vers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을 소중히 하고 보호하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다고 믿는 가치를 실현하고, 삶이 허락하는 가능성을 증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부의 사명이 잠정적이고 부분적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완전하지도 않고, 정부가 완전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입법절차가 우리 삶을 보호하고 성장과 지속이 가능한 방향으로 가게 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타협입니다. 타협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을 섞어서 그 중간 지점을 나눠 갖는 게 아닙니다. 타협은 지성적 과정입니다. 타협은 지금 이곳에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입니다.

기상: 조금 비판적인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교수님의 정치신학이 기독교 국가 컨텍스트에서 더 적절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탠리 하우어워스 (Stanley Hauerwas, 1940-) 같은 분은 교수님께서 권위의 문제에 너무 집착하여 정치적 공동체로서 교회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비판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오도노반: 먼저 두 번째로 말한 것을 이야기해 봅시다. 제 정치신학에는 정치 조직과 권위의 문제가 주요 강조점입니다. 저는 완벽한 신학, 특히 종결된 사회 신학(social theology)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교회론의 끝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하우어워스는 저와 같은 의미에서 정치신학자는 아닙니다. 저는 하우어워스가 교회와 그 역할에 대해 쓴 글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저와 강조점이 다릅니다. 제가 권위의 문제에 집중하게 된 것을 스스로 변호해 본다면, 저는 신문이나 공공 토론만으로는 정치가 현실 세계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직접 살고 있는 눈 앞에 보이는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기상: 그렇다면 교수님의 정치신학이 기독교 문명의 산물이라는 비판에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정치신학이 다종교 컨텍스트에서 어떻게 행해질 수 있습니까?

오도노반: 이 세계에 대한 모든 설명은 특정한 전이해의 구조를 전재하고 있습니다. 안정적이고, 세속화되고, 공리주의적인 단순한 세계란 우리가 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제가 사는 세계를 기독교적 전제를 가지고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전이해의 구조가 중립적 위치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세속적 설명 방법보다 현실을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하는 신학적 작업을 변증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 개인의 전제를 버리고 정치 사회에 대해 처방전을 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제가 갖고 있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상: 교수님의 가장 큰 공헌 중 하나는 현대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보시기에 정치적 자유주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근대 이전의 기독교 전통으로 돌아가서 현대 사회를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오도노반: 두 번째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봅시다. 저는 근대 이전의 자료들을 이용하여 우리의 문제를 성찰합니다. 제 생각에 현대 자유주의 사회의 근원적 문제는 그 사회가 ‘실제 작용하는 방식’에 있다기 보다는 ‘생각하는 방식’에 있다고 봅니다. 현대 자유주의 사회가 생각하는 방식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범주가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저는 신학자이기 때문에 성서와 교회전통에서 범주를 끌어내서 신학자로서 사회에 접근합니다.
현대주의에 물든 정치 이론은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과거와 전혀 다른 곳이라 과거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현재 하는 일이 과거와 단절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지적 존재로 서로에게 귀 기울이며, 공동체의 일부로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거에게 말을 걸고, 과거로부터 배우고, 과거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상: 이제 자유주의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오도노반: 현대 사회의 문제는 이 사회가 발판 없는 조각상 같다는 데 있습니다. 즉 올라서야 할 기반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권위에 대해 이해할 만한 설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권위의 실재 자체를 부정하려 듭니다. 그렇기에 현대사회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의 거의 모든 일들이 소수 사람들에 의해 결정됨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수의 정치적 계층은 국민 전체가 아닌 다수결을 통해 약간 더 수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정부를 거의 독점적으로 운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 삶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도시 정부의 형성과 함께 발달된 자치국가라는 생각은 대의정치 제도와 함께 널리 퍼지며 정착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 우리를 대표하게 되고, 정치적 권력은 정당에게 주어집니다. 우리와 같은 대중이 벌이는 정치에 대한 토론은 중요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답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저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합니다.
서구 자유주의에 대한 저의 근원적 비판은 이 ‘생각’이 서구 남자들이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일련의 거짓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들에게 보다 더 깊이 있는 설명을 해 달라고 요청하고 싶습니다. 거짓은 언제나 나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비판을 하면 ‘중국과 같은 체제에 살고 싶은가? 사담 후세인의 통치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가?’ 등의 반응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체제 선택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해하는지 알고자 노력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서구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다 깊은 차원에서 생각해 보고 그 후 토론해 보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기상: 저의 마지막 질문은 도전적입니다. 정치신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교수님 저작 이외에 3권의 책을 추천해 주시겠습니까?

오도노반: 제 머리에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우선 제가 상당히 취사선택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저기서 생각들을 뽑아와서 아주 형편없이 뒤섞곤 하지요. 제 생각과 방법론에 맞춰 추천하도록 시도는 한번 해보지요.
우선, 고전적인 작품으로 돌아가 봅시다. 현대 정치에 대해 성찰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예언자를 공부해야 합니다. 그 중 제가 언제나 돌아가고픈 작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성』(De civitate Dei, 426)입니다. 특별히 두 도시(신의 도시, 인간의 도시)에 관한 19권이 중요합니다.
다음 작품은 프란시스코 드 빅토리아(Francisco de Vitoria, 1486-1546. 주: 스페인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가톨릭 신학자이자 법학자. 자연법과 정당한 전쟁 이론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의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하여』(De Indis, 1532)입니다. 이 책은 정치적 사고의 범주가 북미 원주민에 대한 아주 잔인한 억압의 현실을 통해 새롭게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책이 5세기, 두 번째 책이 16세기라면, 세 번째 책은 17세기 작품입니다.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 주: 네덜란드의 법학자와 신학자로 자연법을 국제법으로 확장시켜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린다. 현실정치에도 관여하여 시장과 대사로 활동했던 경력도 있다)의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 1625)입니다. 이는 아주 신학적인 책으로, 국제법뿐만 아니라 일반 법이 가지고 있는 깊은 신학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이 세 권외에도 많은 책이 있습니다. 최근에 출판된 책을 읽더라도 이 책들은 새로운 생각을 계속 자극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기상: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인터뷰가 한국적 상황에서 정치신학에 대한 토론이 성숙해지는 데 큰 기여를 할 것 같습니다.

오도노반: 감사합니다. 


대담 및 정리 l  김진혁 박사는 연세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신학대학원(Harvard University Divinity School)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대학교(University of Oxford)에서 철학박사학위(D. Phil.)를 받았다. 박사 학위 중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Ruprecht-Karl-Universitat Heidelberg) 에큐메니칼 연구소 초청으로 객원 연구원 생활을 했으며, 현재는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의 신학과 철학 전문학교인 히쓰롭 컬리지(Heythrop College)의 박사후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2019년 1월호(통권 7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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